드래곤 에이지: 오리진을 플레이하면서 느낀 거지만.

이 게임에서 주적은 다크스폰이란 놈들로, 대충 오크나 고블린 비슷한 놈들인데 다만 색깔이 갈색이라는 점이 특징이죠. 이놈들은 원래 무리를 짓지 못하기 때문에 각개격파당하기 십상인데 아치데몬이란 사악한 아저씨 아래 모이면 숫자도 많고 해서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이놈들을 때려잡으려고 목숨을 걸어가며 쌈박질하는 그레이 워든이라는 집단이 있다, 이친구들은 요즘 미국마냥 전국구 치안집단이라 다른 나라 아저씨들도 인정해주고 왕도 하악댄다 뭐 이런 설정입니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사악한 적과 그 대가리에 맞서서 싸우는 킹왕짱 영웅집단과 선한 종족의 세계... 라는 설정은 사실 매스이펙트에서도 한 번 써먹었던 거고(+또 써먹을 거고) 멀리 가면 반지의 제왕에서 사우론과 사루만 아래에서 중노동하는 오크와 고블린 우루크-하이 타락한 인간들의 호드집단 vs 다 멸망해가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뛰어다니는 간달프와 아라고른 일당이라는 일대일 맞짱체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엘프는 중간계를 떠나가고 있죠. 이야기에 거의 참여 안 합니다. 드워프는 "전쟁이 그들을 찾아갔"기 때문에 안 나오고).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은 이 설정에서 "적"들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죠. 인간형이긴 하지만 척 봐도 사악해 보이고 이질적이고 더럽고 추악하고 아예 이름에 어둠에다크가 들어가거나 악마에데몬이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물론 반지의 제왕에서는 타락한 인간들도 사우론 아래 집결했다지만 그래도 사우론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는 건 오크고 인간들은 표면적으로는 사우론의 동맹(물론 사우론이 동맹같은 걸 진심으로 맺을리가 없지만)으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매스 이펙트에서는 게쓰와 리퍼의 기계집단이고요. 오블리비언에서는 오블리비언의 데드라군단이 이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설정의 편리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SF에서는 주로 기계들, 중세판타지에서는 주로 괴물들이 이런 역할을 차지하고 있고 인간들에게는 발리거나 바르거나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나쁜놈들은 협상이란 것도 모르고 정치라는 것도 모르죠. 왠지는 몰라도 일단 인간은 멸망시키고 봐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현실에서 인간과 치고받고 싸우고 인간을 멸망시키려고 암약하는 건 다름아닌 다른 인간집단에 불과합니다. 사악하고 비열하고 추악한 어둠의 군단의 위치를 차지한 건 사악하고 비열하고 추악할 리가 없다고 믿어온 인간집단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외계에서 온 적들"이란 설정은 이야기의 견고함에 결함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런 건 없으니까요. 우리가 맞서 싸우는 건 뜻이 다른 인간들일 뿐이고 외계의 적에 맞서서 인간이 하나로 뭉쳐지는 건 백만년에 한 번 이루어질 리도 없는 꿈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야기는 판타지로 가고 SF로 가는 것이죠. 거꾸로 말해서 현실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야기의 구조와 설득력 자체가 약해지죠.

어떤 의미에서, "외계에서 온 적들"은 오래 전부터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질적이고 기형적인 모습으로 표현한 데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귀신과 악령에 대한 미신적인 두려움에서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처음 보는 인종과 문화에 대한 두려움 역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계에서 온 적들"과의 전쟁은 사실상 타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더 나아가 타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거부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이야기는 문화간의 소통에 대해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플레이어가 해당 매체가 주로 다루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거부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미국 게임을 플레이할 때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이죠. 무엇보다도 이런 이야기는 갈등구조가 너무 단순합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뒤틀림이 존재해야만 합니다.

드래곤 에이지: 오리진의 경우 종족들을 결합시켜야 하는 그레이 워든에 적대하는 인간 집단을 처음부터 내세움으로써 뒤틀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또한 선한 집단들 내에서도 갈등구조가 형성되어 있고 그것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합니다. 이들의 갈등구조는 어느 한쪽이 악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플레이어에게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폴아웃과 같은 경우, 1편은 FEV로 인해 만들어진 슈퍼뮤턴트들의 집단, 그리고 그들을 연합하는 마스터라는 괴물 집단이 적으로 등장했지만 2편은 이러한 적대집단이 인간의 모임 앙클레이브(Enclave)로 변했습니다. 그것도 미국 정부의 직계 후손이죠. 사실 미국 정부는 민주주의로 이루어졌던 만큼 그 후손이라고 해서 어떤 정통성을 부여받아서는 안 되지만... 뭐 현실은 시궁창 아니겠어요?(사실 이런 문제는 2012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정부라는 놈들이 부유한 사람들과 정부 요인, 과학자들은 중요하기 때문에 살려놓고 나머지는 다 죽"였"잖아요.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들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나요?) 게다가 그네들은 물자도 풍부하고 과학력도 뛰어납니다. 정부가 벌인 핵전쟁의 재앙에서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들은 갑툭튀한 듣보잡들에게 협박당하는 꼴이 되었죠. 3편은 사실 앙클레이브도 슈퍼 뮤턴트도 주적이 아닙니다. 물론 앙클레이브가 이야기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주된 적대세력이긴 하지만 정화장치의 운명은 주인공이 스스로 결정해야 하죠. 게다가 주인공이 앙클레이브보다 심한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비록 BoS를 선역으로 돌리고(아웃캐스트는 여전히 중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주인공이 좋든 싫든 인간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첨병이 되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오블리비언 때보다는 높게 평가할 만 합니다.

모로윈드같은 경우에는 괴물로 표현되는 적이 존재하지만 사실 아군이라고 별반 다를 바가 없죠. 주인공 네레바린에게 있어서 제6가문은 오히려 주인공에게 충성을 바쳤던 자의 세력이고 바덴펠을 지배하는 비벡을 비롯한 삼신들은 네레바를 죽이고 맹세를 저버린 배신자라는 겁니다. 그리고 제6가문은 그들과 함께하고 배신자 삼신들을 처단하자고 끊임없이 주인공을 유혹하죠. 그들이 원하는 건 세계의 멸망이 아닌 배신에 대한 뒤틀린 복수라는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지? 다고스 우르 역시 로칸의 심장을 독차지하기 위해 삼신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선과 악의 모호함은 메인퀘스트 뿐만 아니라 서브퀘스트에서도 끊임없이 발견할 수 있는데 마법사 길드와 텔바니 가문간의 암투, 도적 길드와 전사 길드간의 투쟁, 그리고 전사 길드와 마법사 길드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부패하고 무능한 수뇌부. 어느 길드는 선하고 어느 길드는 악하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점은 역설적이게도 오블리비언의 다크 브라더후드 서브퀘스트에서 극에 치닫습니다. 살인자와 흡혈귀로 이루어진 암살길드. 플레이어에게 인간성을 버릴 것을 요구하는 임무들. 그리고 그 결과는 사실상 브라더후드의 완전한 파멸로 치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브라더후드의 존재 이유죠. 죽이고 파멸시키기 위해서.

적대세력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는 어쌔신 크리드, 모던 워페어 2 등의 액션 게임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의 뒤틀림은 이야기를 지루하지 않게 하고, 철학적인 깊이를 더해 주며, 플레이어에게 몰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합니다. 이야기에 영속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이런 뒤틀림은 항상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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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6 14:14 2009/12/26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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